"헤르메스. 진정좀 하고 애비 말부터 좀 들어다오. 네 동생도 가만 있잖니"



"..."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은 어느 성의 첨탑 꼭대기 층.


한 노년의 남자와 두명의 아이들이 서로를 마주본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헤르메스는 어두운 낯빛을 띤 얼굴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아버지를 흘겨보았다. 그의 여동생인 실비어는 자신의 목에 달린 금빛 달조각의 목걸이를 만지며, 잠자코 아버지의 말씀을 새겨듣고 있었다.



헤르메스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아버지, 아니 폐하. 국왕의 자손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희가 정녕 이런 대접을 받아야만 하는것입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헤르메스."



국왕이자 두 자녀의 아버지인 번은 진짜로 알 수 없다는 눈짓을 해보이며 물었다. 그리고 곧 그것이 실수라는것을 깨달았다. 헤르메스는 더욱 어두워진 낯빛으로 물었다.



"왕국의 근교에 사는 아이들과 저희 기사들의 사이가


좋지못한것은 폐하께서도 잘 알고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말하자 잠자코 있던 실비어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는것이 번의 눈에 들어왔다. 번은 다시 헤르메스를 보았다. 그는 이제 자신의 아버지를 증오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저희를 왜 근위대로 넣지않고 정예로 넣으신겁니까? 저흰 아직 근처의 근위병들만도 못한 수준인것을 잘 아시면서도 말이예요"


"그러니깐 일단 애비 말부터..!"



"필요없어요!"



일순간에 끊긴 목걸이의 끈이 작은 금속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실비어의 두 눈은 커다랗게 커져선 횃불의 불꽃을 받아 심하게 일렁였다.




"뭐 하는 짓이냐!!"



번의 호통에 방금전의 패기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몸이 잔뜩 움츠러졌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깟 정예군 소속의 달조각 따위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다니. 좀처럼 화를 안 내던 아버지였기에 헤르메스는 움츠러들 수밖에없었다.



"다시 줍거라"



번은 절제된 감정으로 달조각의 징표를 가리키며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곳에 내재되어있는 분노는 헤르메스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지만 차마 입을 뗄 용기는 나지 않았다.




짤그랑




어느새 헤르메스의 손에 달조각의 징표가 올려졌고 여동생인 실비어는 떨리는 눈동자로 헤르메스에게 경고를 주곤 재빨리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번도 그제서야 자세를 풀곤 헤르메스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헤르메스. 근교와 성 외곽지역의 덜 떨어지는 아이들하곤 어울리지 말라고 당부를 했을텐데, 이젠 알아서 통보를 해주는 것이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것이냐?"



실비어는 헤르메스가 또 무슨 말을 내뱉을까 불안하여 아버지와 그의 사이를 조심스레 번갈아 보았다. 헤르메스는 마음을 굳힌듯 힘을 주어 말했다.



"귀족들과의 관계는 정치일 뿐이며 마음이 맞아서 만나는 아이들도 아닙니다. 그리고.."



헤르메스가 슬픈 듯 인상을 썼다.


"제 신분을 알아차린 아이들은 전부 제 곁을 떠나갔습니다. 왕자라는게 원래 그토록 외로운 위치인겁니까? 전 이런 생활에 지쳐버렸습니다. 저는 좀 사람다운, 마음 맞아서 어울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실비어는 조용히 헤르메스를 지켜보다 침을 삼켰다.


그 모습에 번은 실비어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게 합리적인 대답이라 생각하느냐?"


"아뇨"



즉답에 놀란 헤르메스는 실비어를 빤히 바라봤다.


자신의 오빠에게 슬쩍 눈길을 던진 실비어는 또박하면서도 귀품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애초에 신분이 다르니 어울리는 곳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귀족들이 기초적으로 배우는 가문들과의 예절이자 상식이죠. 하층 계급들과의 교류가 잦아지고 친분이 맺어진다면 상대측에선 연결을 맺고싶어할 테이고, 그런 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면 귀족체계 속 상류층의 물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국왕의 직계 후손이라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해선 안된다는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번은 흡족한 얼굴을 하며 실비어를 보았다.
실비어도 작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알겠느냐? 헤르메스? 내가 괜히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것을.."



헤르메스는 증오어린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다가 절망스러운 듯 고개를 떨궜다. 그런 헤르메스의 어깨에 실비어가 손을 올리자 번이 말했다.



"헤르메스, 넌 장차 왕이 될 사내이다. 주민들을 생각하는것은 왕이 된 후에 해도 늦지않아.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너는 훗날 이 나라를 지켜야할 사명을 갖고서 자신을 단련시켜야 한다. 


그 사명이 결국엔 너의 친구들을 위해서란걸 알고 열심히 임해주었으면 좋겠구나.."



"예...폐하.."




"...그리고 그런 놈들은 어차피..."




...



첩탑의 꼭대기 층 횃불이 불을 감추고 번이 잠자리로 들어갔을때 헤르메스와 실비어는 성의 테라스로 나왔다. 인상을 일그러뜨린 헤르메스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왜 방해 한거야, 너도 같이 잘 놀았으면서 말이야!"


"헤르메스, 너 설마 아버지께서 그걸 허락 하시리라     믿은거야? 세상에, 생각보다도 더 멍청하군."



잠시 말을 잊은 헤르메스는 입을 다물고선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다. 일그러진 표정은 그대로였다.

실비어가 테라스에 몸을 기대고선 말했다.



"우리가 직속만 소수정예일 뿐이지 훈련이나 각종 일정등은 우리가 알아서 짜는거나 다름없어. 국왕직계의 왕자, 왕녀라서 따지고보면 거의 자유란 말이지."


"뭔가 놓치고 있는것 같은데, 아버지의 수하가 우리의 훈련 일정을 검토하고 보고하고 있는데 어떻게 자유라는거지?"



"그래서 걸린적이라도 있어?"


"..."



실비어는 씩 웃음을 짓더니 자신의 벨트에 차인 호주머니속에서 작은 루비보석을 하나 꺼냈다.



"아버지의 수하래도, 걔들도 결국은 우리 밑이야. 그걸 알라고"



"그런..."


놀란 눈치에 약간 경멸섞인 표정으로 실비어를 흘기던 헤르메스는 테라스의 아래로 펼쳐진 가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선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왜?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아니.. 아까 아버지가 한 말.."


"아..."



말이 없어진 둘은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테라스의 아래로 번득이는 횃불들과 주민들을 응시했다.



일사분란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아이들이 보였 고 게으르게 퍼질러진 사람도 간혹 보였다.


말없이 사람들을 내려다보고있던 둘은 생각했다.





'...그리고그런 놈들은 어차피...전쟁이 터지면 도망칠 녀석들이니깐..'



'전쟁이라뇨?'


헤르메스가 놀라선 물었다.



'우리 리버톤 왕국은 역사로 미루어봐도 제국들간의 전쟁이나 참전에 전혀 개입도 하지 않았잖아요.'



실비어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곤 귀품없는 목소리로 지껄이고 말았다. 하지만 번은 예상했다는 얼굴로


침착히 설명을 이었다.



'과거 제국들간의 무차별적인 대전으로 인해 황폐화 된 제국이 많다는것은 알고있을테다. 그 제국들 중에서도 승리를 거머쥐고서 전 제국을 자신들의 왕국으로 전락시켜버린 종교국가 엘버룬 제국과의 마찰이 최근들어 고조되고 있어. 무역 문제인데 꽤나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하더군.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상태야'



'엘버룬 제국이라면 타 왕국들과의 교류도 활발할텐데 왜 하필이면 저희 리버톤 왕국과 문제가 생긴거죠?'



'과거의 무자비한 침략전쟁들 덕분에 그들의 땅은 황폐화가 아직 복구되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무역을 통한 자본조달이 쉽사리 성사되지가 않자 그것을 빌미로 자원약탈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지'



'그럼.. 저흰 어떡하면 좋죠?'


실비어는 불안해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번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화가 났다는 눈으로 실비어를 쳐다보았다.



'죽는 한이 있어도 싸워야 한다. 싸워서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너흰 왕국을 지키는 주인들이자 전사가 아니더냐?'



얼어붙은 자식들을 돌아보다 헛기침을 뱉은 번은 엄중한 목소리로 한번 더 강조했다.



'....너희는 이 나라의 주인이다. 주인이 아닌 놈들은 후방의 소더안 지역으로 가장먼저 꽁무니를 뺄테지. 그런 자들과 연을 맺었다면 당장 연을 끊도록 해라. 그런 사람들은 더이상 왕국의 보살핌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일지어니..'



밤하늘 속 기울어진 초승달이 횃불꺼진 가구들을 어둠속에 잠식 시키고 그림자를 만들었다.


헤르메스와 실비어는 자신의 친구들과 안면이 익은 주민들을 떠올렸다.



'과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쟁에 참가할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ㅇㅇ 
원래 주인공 시점의 이야기가 따로 있는데 
과거의 다른 인물 시점으로 써봄.
전쟁 터지기 전 스토리. 어떰?
술술 읽히긴 하나?